지극한 변화무쌍 

서정민갑 | 대중음악의견가

친다. 정은혜는 피아노를 치고 서수진은 드럼을 친다. 배일동은 소리를 치고, 지박은 첼로를 친다. 피 아니스트 정은혜의 음반 [치다]는 2019년 7월 19일 서울 통의동의 레코딩 스튜디오 오디오가이에서 진행한 공연 ‘치다’의 실황 녹음 음반이다. 정은혜는 지난 해 홀로 피아노를 치며 자유즉흥연주 음반 [Chi-Da: Be Silent as Loud as Possible]을 내놓았고, 이듬해 더 많은 뮤지션을 불러 모아 자신의 ‘치다’ 프로젝트를 실연했다.

연주자를 늘린 공연은 솔로음반과 다를 바 없이 자유즉흥연주를 고수한다. 즉흥연주가 없는 재즈는 재즈가 아니니, 자유즉흥연주를 펼친다는 사실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정은혜와 배일동, 서수진, 지박은 이 공연에서 자유즉흥연주의 본질에 최대한 근접한다. 네 뮤지션은 리허설도 하지 않고 곧 바로 자유즉흥연주에 돌입했다.

이날 네 뮤지션이 연주한 곡은 다섯 곡. <Jeogori>, <Return to Life>, <The Hope Landed>, <The Sacrifice>, <Curtain Call>로 이어진 레퍼토리는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10분을 넘는다. <The Hope Landed>는 무려 25분이다.

그런데 이 음반의 차이는 곡의 길이만은 아니다. 자유즉흥연주를 담은 다른 재즈 음반이나 한국전통 음악과 협연한 크로스오버 음악들이 선택하는 방식과 정은혜의 방식은 사뭇 다르다. 정은혜는 한순간도 장단이나 가락 혹은 노랫말이 선험적으로 제시하는 서사에 붙잡히지 않는다. 오직 그 순간 튀어나 온 마음이 향하는 음악의 길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고 발 빠르게 좇아갈 뿐이다. 자유즉흥연주는 그렇게 연주자의 마음을 열어 무의식 같은 소리를 끄집어 내는 일이고, 다른 연주자의 소리에 흠뻑 젖은 채 따라가는 일이며, 따라가다 돌연 멈춰서 자기 이야기를 주섬주섬 시작하는 일이고, 순간으로 순간 너머를 기록하고 채우는 일임을 증명한다.

정은혜와 배일동, 서수진, 지박은 이 공연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연주한다. 순서도 없고 테마도 없다. 피아노가 연주하면 첼로가 붙고, 노래가 터졌다가 어느새 사라진다. 드럼 연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고, 없는 줄 알았는데 있다. 판소리 역시 대목을 수시로 바꾼다. 굳이 특정 판소리의 특정 부분이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음반을 감상하는 방법은 이 음반의 변화무쌍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일이다. 소리를 높이거나 낮추거나, 장단을 당기거나 풀거나, 등장하거나 사라질 때, 모든 소리들은 서로에게 묶이지 않는 듯 묶여 움직인다. 각자 독립한 소리들이 터져 나와 흐르고 내지를 때, 그 소리들은 제 길을 가는 것처럼 들리지만 은밀하고 미묘하게 연결되어 한 몸이 된다. 인터플레이라든가 앙상블이라는 단어보 다 조응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음악의 교신은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면서 상대를 더욱 돋보이 게 한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되는 음악의 충만한 조응은 한 악기의 결과 품을 극대화할 뿐 아니라 자유즉흥연주의 본질에 순식간에 도달한다.

이는 재즈 연주자의 숙련된 자유즉흥연주라는 순간적 작곡 능력에 기인하겠지만, 하나의 곡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지하고 조응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발판이 되고 뼈대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 조화는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낮추거나 감추기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때로는 상대를 침범하고 침범 한 상대조차 받아 안으며 맞받아칠 때, 미리 약속하지 않았던 풍경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이야기는 한없다. <사랑가>에 이어 재일본 조선학교의 노래 <저고리>가 더해지고, 세월호 참사의 희생을 외면하지 않는 음악은 소리의 방법론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더욱 의미 있게 채운다.

음울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도드라지는 <Return to Life>는 생의 종말과 고통을 증언하는 듯 비감하고 냉정한 정서가 끈질기다. 포기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삶의 무게를 펼치는 자유즉흥연주는 중중모리로 치는 심청가를 만나며 더욱 심오해진다. 희망을 노래하려는 듯 <The Hope Landed>라고 제목을 붙인 곡은 25분의 긴 자유즉흥연주로 음반에서 가장 자유로운 음악을 향해 나아간다. 장단의 변화와 가락의 돌출, 판소리의 등장과 소멸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이어지는 동안, 애절함과 적막함을 아우르는 음악은 한결같이 다를 뿐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현재의 역사를 밝히는 빛으로 삼자는 내용을 담은 곡 <The Sacrifice>는 정은혜가 아트스코어라고 부르는 그래픽스코어를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펼친다. 슬픔의 통렬함으로 바짝 조여가는 연주는 절망을 건너 희망으로 나아가는 고단한 길에서 <엄마야 누나야>로 진혼곡을 대신한다. 애끓는 목소리의 뒤편에서 제각각의 소리로 위무하는 연주는 잊을 수 없는 비극의 고통 어린 책임감을 충실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다른 곡에 비해 짧은 마지막 곡은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공연을 마무리한다. 이 순간 감도는 사이키델릭한 아우라는 음반의 끝까지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듣는 이를 움켜쥔다. 음악의 길은 이렇게 아무런 틀도 없고 벽도 없다. 오직 무한한 가능성일 뿐이다. 그 어디쯤에서 우리가 만나 이 음악을 듣는다. 듣는만큼 새롭고 자유롭다. 새삼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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